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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잔잔하게 불고 햇살은 적당히

doinmai8 2025. 3. 15. 19:39

창가에 앉아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 조금은 느려지는 기분이 듭니다. 오늘도 그런 오후였습니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고, 햇살은 적당히 따뜻했습니다. 창문을 반쯤 열어 두었더니 커튼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방 안에 봄의 향기를 들여보냈습니다.

저는 손바닥 위에 찻잔을 올려놓고 온기를 느끼며 한 모금 마셨습니다.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치고, 따뜻한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니 마음까지 차분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게 꽤 오랜만인 것 같았습니다.

아침부터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고, 점심때는 간단히 한 끼를 때우듯 먹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 속에서 문득 이렇게 숨을 고르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길가의 가로수들이 연둣빛 새 잎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완연한 초록이 아니지만, 분명 봄이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결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걷는 아이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봄이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날은 괜히 오래된 앨범을 꺼내 보고 싶어집니다. 서랍 속을 뒤적이다가 몇 년 전 봄에 찍은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걷던 어느 날,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나와 눈을 맞추며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날도 지금처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가벼운 셔츠 하나만 걸쳐도 충분했던 날씨였습니다. 벚꽃잎이 바람에 날려 머리 위로 소복이 쌓이던 순간을 떠올리니, 괜히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는 듯했습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다시 서랍 속에 고이 넣으며 조용히 웃었습니다. 지나간 날들은 저만의 소중한 보물이 되어 이렇게 가끔씩 저를 찾아와줍니다.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셨습니다. 여전히 따뜻하고, 여전히 기분 좋은 향이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니 오후의 햇살이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습니다. 이제 곧 해가 기울겠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오늘의 이 순간은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요.

어쩌면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소소한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한 박자 쉬어갈 줄 아는 여유, 스쳐 지나가는 계절을 한 번 더 눈에 담는 마음. 그런 것들이 쌓여 하루를, 그리고 삶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했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이렇게 작은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며 살아가야겠다고.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또 한 장의 소중한 추억이 쌓여 있을 테니까요.